
멜론이 인디음악 활성화 프로젝트 ‘트랙제로’의 9월 이달의 아티스트로 R&B 싱어송라이터 유라(youra)를 선정했다. 지난 7월 새 EP ‘Brush’를 발표한 유라는 이번 심층 인터뷰에서 앨범을 관통하는 ‘결’의 의미부터 다섯 트랙의 제작 과정까지 직접 풀어냈다.
유라는 이미 제21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정규 1집 ‘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 수록곡 ‘구운듯한 얼굴이 너의 모티프’로 최우수 알앤비&소울 노래상을 받은 바 있다. 2019년 발표한 EP ‘B side’도 멜론 ‘명반’에 선정됐다. 이번 트랙제로 선정은 그동안 쌓아온 음악적 성취와 새 EP에서 이어지는 독자적인 언어를 함께 조명하는 자리다.
‘Brush’에 남긴 다섯 개의 결
7월 발매된 EP ‘Brush’는 알앤비·소울과 인디 음악의 경계를 오가는 다섯 곡으로 구성됐다. 수록 순서는 ‘고삐’, ‘누군가 먼저 뜬 자리’, ‘목욕탕’, ‘2510 기미’, ‘고양이의 편안한 숙면을 위한 야상곡 제1번’이며, 유라는 이 다섯 곡이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을 차례로 엮는다고 설명했다.
앨범명은 브러시의 텍스처에서 출발했다. 유라는 “브러쉬의 텍스쳐를 보고 떠올렸다”며 “자연스러운 향기나 결, 흠집 없이 매끈하게 정제된 것들은 피하려고 한다. 음악 안에서도 각자의 질감이 살아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말했다. 표면을 고르게 다듬는 대신 사람과 사건이 남긴 흔적까지 음악 안에 남기고 싶었다는 뜻이다.
유라가 말한 ‘결’은 사물의 표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어떤 대상뿐만 아니라 인간이 삶 속에서 유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나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결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규 1집에서 음색과 은유적인 언어를 중심으로 구축했던 음악 세계가 이번 EP에서는 시간과 기억, 악기의 촉감으로 이어진다.
필례산장에 남은 이별 여행
앨범 소개글은 “25년 가을, 나는 필례산장으로 잠들러 가는 길이었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유라는 이 글의 배경을 “강아지와 이별 여행을 떠났던 산장에서의 일”이라고 밝혔다. 당시를 두고도 “꽤 힘들었지만 돌이켜 보면 전부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고 답해, 견디기 어려웠던 시간이 지금의 음악 안에서는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음을 전했다.
소개문에는 비와 산, 작은 개, 후회와 그리움처럼 구체적인 이미지가 이어진다. 단순히 슬픈 기억을 정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시 감각을 그대로 남겨두면서 시간이 지나 그것이 다른 의미로 바뀌는 과정을 담는다. ‘Brush’가 과거·현재·미래를 트랙 순서에 따라 엮는다는 설명도 이 경험과 맞닿아 있다.
유라는 매끈하게 끝난 이야기보다 시간이 지나도 흔적이 남는 기억을 음악의 재료로 삼는다. 강아지와의 이별 역시 완전히 정리된 사건으로 밀어내기보다 현재의 자신을 이루는 한 겹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앨범의 ‘결’은 상처를 없애는 방식보다 상처까지 포함해 남은 시간을 바라보는 태도에 가깝다.
재즈 트리오에서 출발한 ‘고삐’
첫 곡 ‘고삐’는 처음부터 유라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 아니었다. 원래 재즈 트리오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곡이 유라에게 전해졌고, 유라는 “곡을 듣자마자 작년에 꽤 뇌리에 강하게 박혔던 일화가 생각나 빠르게 완성했다”고 말했다.
작업 과정에 대해서는 “넣고 싶은 악기를 더해 디테일을 가미했고, 베이스는 실제 악기로 연주했다가 다시 가상 악기로 돌아가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미 만들어진 연주 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질감이 나올 때까지 악기와 소리를 바꿔가며 곡의 표면을 다시 만든 셈이다.
“나를 천천히 구워줘, 철들기엔 아직 떫어”라는 가사에는 스스로 아직 정신적으로 완전히 익지 않았다는 감각을 담았다. 유라는 “제가 철들기엔 아직 정신적으로 미성숙하고 익지 않아 떫다는 의미”라고 풀어냈다. 이어 “특별한 작사 습관은 없지만 접하고 읽고 삼키고 내뱉는 감정들이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아날로그 잔향에서 플루트까지
2번 트랙 ‘누군가 먼저 뜬 자리’는 첫 곡과 정반대의 질감을 가진다. 유라는 “1, 2번 트랙 작업자분들 모두 기가막힌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다”며 클라리넷과 베이스 전공자들이 만들어낸 세밀한 연주를 짚었다. 두 곡을 연이어 배치한 것은 비슷한 소리를 반복하기보다 서로 다른 촉감을 한 앨범 안에 나란히 두는 선택으로 읽힌다.
특히 2번 트랙 작업자에 대해서는 “다양하고 역사 깊은 아날로그 악기, 앰프, 콘솔 등을 모으는 친구”라고 소개했다. 이어 “어쿠스틱 룸에서 90년대 기타 앰프로 마이킹해 연주하고, 딜레이와 잔향까지 의도적으로 신경 썼다”고 설명했다. 장비와 공간에서 울리는 소리까지 곡에 남긴 점은 매끈한 정제보다 질감을 살리려는 앨범 방향과 맞물린다.
3번 트랙 ‘목욕탕’에서는 플루트가 전면에 나온다. 유라는 “플루트가 멱살 잡고 끌고 가는 곡”이라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 잠시 플루트를 배웠던 경험과 오래된 동경이 이번 곡에서 다시 이어졌고, 자신도 다섯 곡 가운데 ‘목욕탕’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그 이유로는 “으레 사람들이 기대하는 클래식 유라의 귀환 같아서”라고 답했다. 유라는 자신의 이전 곡 ‘미미’와 ‘세탁소’를 함께 들어보라고 권하며 현재의 ‘목욕탕’이 과거 음악과 이어지는 지점도 직접 짚었다.
‘2510 기미’와 고양이를 향한 시선
4번 트랙 ‘2510 기미’의 ‘기미’는 피부에 생기는 기미를 가리킨다. 유라는 이 곡을 “좋아하는 대상에 관해서 쓴 곡”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푸념이나 염원을 담았고, 자주 기억하고 싶어서 만든 곡”이라고 덧붙였다. 앞선 곡들이 과거의 일화와 작업 방식, 오래된 악기의 질감을 끌어왔다면 ‘2510 기미’는 기억하고 싶은 대상을 붙잡는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마지막 수록곡은 ‘고양이의 편안한 숙면을 위한 야상곡 제1번’이다. 유라는 “고양이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존재”라며 “황무지처럼 허허벌판이었다가 모두 저한테 착 붙어버리는 성질도 가지고 있고, 나비처럼 사뿐한데 종이날처럼 예리할 때도 있고, 고라니처럼 빽빽 울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고양이가 한 가지 성질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 이미지로 풀어낸 뒤 유라는 결국 “물속처럼 알 길이 없는 연구 대상”이라고 표현했다. 다섯 곡의 끝에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계속 바라보는 태도가 앨범이 말하는 서로 다른 ‘결’과 맞닿는다.
멜론 트랙제로는 유라의 인터뷰와 함께 전문위원들이 고른 추천 플레이리스트도 공개한다. 2022년 4월 시작한 트랙제로는 매달 국내에 음원을 발표한 음악가 가운데 이달의 아티스트를 선정하고 최근 3∼4개월 안에 발표된 곡 가운데 추천 신곡을 고르는 인디음악 활성화 프로젝트다.
정제되지 않은 기억과 악기의 촉감, 좋아하는 대상과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까지 다섯 곡에 서로 다른 결로 남긴 유라의 ‘Brush’가 9월 트랙제로를 통해 다시 조명된다. 한 장의 EP 안에서 가장 오래 귀에 남는 질감은 어떤 곡일까?
사진 : 카카오엔터테인먼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