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240회 조세이 탄광 수몰 사건의 진실 재조명

꼬꼬무 240회 조세이 탄광 수몰 사건의 진실 재조명

9월 10일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40회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의 비극이 서린 ‘조세이 탄광 수몰 사건’의 전말과 83년 만에 수습된 유골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강제동원 조선 청년들의 해저 지옥

1930년대 후반 일제는 한반도 곳곳의 청년들을 전시 노동력으로 동원했다. 신체검사를 거친 청년들은 목적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일본으로 끌려갔고,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던 조세이 탄광 역시 이들이 투입된 현장 가운데 하나였다. 탄광 주변에는 높은 울타리와 감시 초소, 탈출을 막기 위한 전기선까지 설치돼 있었고, 도망치다 붙잡힌 노동자들에게 폭행과 고문이 가해졌다는 증언이 전해졌다.

조세이 탄광은 육지가 아니라 바다 밑으로 갱도가 뻗은 해저 탄광이었다. 광부들은 비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한 채 하루 12시간씩 2교대로 석탄을 캤고, 깊은 갱도는 환기도 쉽지 않아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제한될 만큼 열악했다. 머리 위로 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얕은 해저 아래에서 작업했다는 설명에 박태환은 “내가 폐소공포증이 없는데도 생길 것 같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183명 삼킨 조세이 탄광 수몰

비극은 1942년 2월 3일 현실이 됐다. 해저 갱도에 바닷물이 밀려들면서 작업 중이던 광부 183명이 빠져나오지 못했고, 이 가운데 조선인은 136명, 일본인은 47명이었다. 바다 위로 하얀 거품과 물기둥이 치솟는 상황에서도 구조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갱도 입구는 결국 막혔다. 가족들은 희생자의 시신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생사와 마지막 순간을 알 수 없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사고의 배경에는 전쟁 중 석탄 생산량을 끌어올리려 한 무리한 증산이 있었다. 안전을 담당하던 인력까지 채굴에 투입되고 갱도 붕괴를 막아야 할 탄주까지 캐냈으며, 사고 전부터 평소보다 훨씬 많은 바닷물이 스며드는 이상 징후가 나타났지만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김종서는 “전쟁에 몰두한 나머지 안전은 안중에도 없었다”라며 희생을 막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작업을 이어간 상황에 탄식했다.

49년 만에 전해진 부고

사건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참사 49년 뒤인 1991년이었다. 일본 우베시의 고등학교 교사 야마구치 타케노부는 옛 탄광 사택을 방문한 일을 계기로 조세이 탄광의 참상을 알게 됐고,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일본 시민들과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을 결성했다. 오랜 세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희생자들의 이름과 가족을 찾는 작업도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이들은 사찰에 남아 있던 창씨개명 사망자 명부를 토대로 조선의 옛 주소지를 추적해 1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다. 그중 17통의 답장이 돌아오면서 50년 가까이 아버지와 가족의 생사조차 알지 못했던 유족들에게 뒤늦은 부고가 전해졌다. 이후 한국과 일본의 유족과 시민들이 함께하는 추도식이 열렸고, 희생자들의 본명을 새긴 추도비를 세우는 작업도 이어졌다. 박태환은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라고 말하며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83년 만에 드러난 검은 유골

‘새기는 모임’의 목표는 추모에 머물지 않았다. 바다 밑에 남아 있는 유골을 찾아 가족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옛 갱도 도면과 생존자 증언을 다시 맞춰가며 위치를 추적했다. 2024년 9월부터 갱구를 찾기 위한 사전 발굴 작업이 시작됐고, 같은 해 10월 말에는 사고 뒤 닫혀 있던 갱구를 통해 82년 만에 잠수 조사가 진행됐다.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는 위험한 환경 속에서도 유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쪽 갱도로 조금씩 접근했다.

이어 2025년 8월에는 한국인 잠수사들이 수중 조사에 참여해 해저 갱도에서 희생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게 변한 유골을 처음 발견했다. 참사 발생 83년 만이었다. 당시 대퇴부와 두개골 등을 포함한 인골이 수습됐고, 주변에서는 여러 사람의 흔적을 짐작하게 하는 물품도 확인됐다. 박태환은 “영화에서나 봤다”라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김종서는 유골이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을 바라보며 “너무 오래 걸렸다”라고 먹먹함을 드러냈다.

DNA 감정으로 이어진 귀환 과제

2026년 1월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발굴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DNA 감정을 양국이 함께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2월 추가 잠수 조사에서 유해 1점이 더 발견됐고, 5월에는 양국 정부가 DNA 감정 절차와 방법에 합의해 감정 착수 계획을 공식화했다. 6월에는 일본 측이 유골의 DNA형 감정에 착수하고 시료를 한국 정부에 넘기면서 신원 확인 절차가 실제 단계로 넘어갔다.

그러나 유골이 발견된 지 1년이 지난 시점에도 신원 확인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9월 8일 기준 조선인 희생자 136명 가운데 37명은 유족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확인된 99명의 희생자 가운데 23명의 유족도 DNA 감정이 완료되지 않았다. 확보된 검체는 76명분이며 유골 DNA와의 대조 작업 역시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다. 희생자의 이름을 되찾고 남은 유해를 추가 수습해 가족에게 돌려보내기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방송 말미 변요한은 “양심, 사명감, 부끄러움을 아는 일, 그리고 일본 시민들의 사죄의 말까지, 모두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라고 했다. 김종서는 “갱도 입구가 열리는 순간, 피고름이나 눈물 이런 것들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라며 울컥했고, 박태환은 “더 늦기 전에 하루빨리 남은 유골들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바닷속에 남아 있는 희생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방송이 끝난 뒤 각종 SNS와 커뮤니티에서도 “수몰 징조가 있었음에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게 원통해”, “유족분들이 진상을 알고 나서 무슨 심정이었을지 짐작도 안된다”, “일본 정부가 외면했던 사건을 일본 시민들이 모여서 진상을 알렸다는 게 고마울 뿐이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 유골이 수습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길” 등 조세이 탄광 희생자와 유족을 향한 반응이 이어졌다.

83년 만에 발견된 유골은 끝난 사건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아직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드러냈다. 방송을 통해 조세이 탄광의 진실과 유골 수습 과정을 마주한 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사진 : 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