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인사이트 297회 한남 아파트 탄생기

다큐 인사이트 297회 한남 아파트 탄생기
다큐 인사이트 297회 한남 아파트 탄생기

한남대교를 건너다 바라보면
가파른 언덕 위로 교회 첨탑과
이슬람 사원이 먼저 보이던
서울 용산구 보광동이 있다.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이
집을 구하고 삶을 시작했던 이 동네는
이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거대한 변화를 앞두고 있다.

‘단군 이래 최대 재개발’이라 불리는
한남뉴타운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보광동의 익숙했던 골목과 집은
빠른 속도로 모습을 감추고 있다.

10월 1일 방송되는 KBS1
‘다큐 인사이트’ 297회
‘한남 아파트 탄생기’는
새 아파트가 들어서는 장면만 바라보지 않는다.

사라지는 동네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주민,
재개발을 새로운 기회로 바라보는 사람,
저렴한 방을 찾아 들어온 청년,
그리고 없어지는 집을 기록하는 건축가까지.

같은 보광동을 서로 다른 이유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새로 만들어가는지 질문한다.

도시의 마지막 풍경, 서울 한복판 작은 쌀집

도시의 마지막 풍경, 서울 한복판 작은 쌀집
도시의 마지막 풍경, 서울 한복판 작은 쌀집

“여기를 안 거치고 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거의 다 거쳤다고 봐야지, 사랑방 같은 거지.”

보광동 거주 53년 차인
우대헌 씨의 말이다.

우대헌 씨는 보광동에서만
52년째 쌀집을 운영하고 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쌀집이지만
재개발의 흐름 앞에서는
그 역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원래 가게가 있던 곳은
한남 3구역이었다.

재개발 사업이 속도를 내고
3구역 철거가 진행되면서
우대헌 씨는 8개월 전
지금의 자리로 가게를 옮겼다.

오랫동안 오가던 집과 가게가 사라지고
골목의 모양도 달라졌지만
쌀집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만큼은
아직 끊기지 않았다.

가게 문을 열기도 전에
주민들이 먼저 찾아온다.

커피 한 잔을 직접 타 마시고
어젯밤에는 별일 없었는지,
누가 언제 이사를 가는지,
동네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쌀을 사고파는 가게라기보다
동네 사람들이 매일 얼굴을 확인하는
작은 사랑방에 더 가깝다.

수십 년 동안 같은 골목을 오가고
서로의 자식이 자라는 과정까지
지켜본 주민들에게 쌀집은
마지막까지 남은 공동체의 공간이다.

그러나 주변 풍경은
계속해서 달라지고 있다.

한남3구역은 철거를 마쳤고
한남2구역 역시 주민들의
이주가 상당 부분 진행됐다.

4구역과 5구역에는
아직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 역시 언젠가는
자리를 비워야 할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

공사장 가림막과 철거 현장을
경계 삼아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동네의 변화는 미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문을 닫은 가게,
어제 사라진 집,
다음 달 떠날 이웃을 통해
매일 직접 확인하는 현재다.

그래서 쌀집에 모여
나눠 마시는 공짜 커피 한 잔도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서로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주민들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세기 동안 이어진
이 작은 사랑방에서
사람들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을까.

다양한 욕망의 집결지가 된 보광동

다양한 욕망의 집결지가 된 보광동
다양한 욕망의 집결지가 된 보광동

“지금 2030이 서울 아파트를 사려면
일반적인 월급쟁이는 쉽지 않겠다.
현실적으로는 재개발 구역에 있는 빌라를 사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럼 나중에 어쨌든 신축이 되는 거니까.”

보광동을 바라보는 사람이
오래 살아온 주민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33세 박석경 씨는
보광동 임장 스터디에 참여하며
재개발 현장을 직접 살펴본다.

누군가에게는 사라지는 고향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앞으로 들어설
새 아파트를 기대하는 투자 공간이다.

보광동의 위치는
재개발 기대를 더욱 키운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과 마주하고,
이태원과 한남동 사이에 자리한
서울 중심부다.

과거에는 높은 언덕과
낡은 저층 주택이 이어지는
서울 한복판의 달동네 이미지가 강했지만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평가는 빠르게 달라졌다.

한남뉴타운 전체 공급 규모는
약 1만 3,000여 가구로 제시된다.

기존 주택 몇 동을
새 아파트로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거리와 주거 환경,
생활 기반 전체가 달라지는
대규모 도시 재편에 가깝다.

그만큼 이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욕망도 여러 갈래로 나뉜다.

누군가는 오랫동안 살아온 집을
언제 비워야 할지 고민하고,
누군가는 개발이 끝난 뒤
새로운 생활을 기대한다.

또 누군가는 아직 가격이
완전히 올라가기 전에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계산한다.

실제로 주민들이 떠난 자리 주변에는
예전과 다른 부동산 간판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재개발 구역의 빌라와
입주권 가능성을 살피기 위해
동네 골목을 직접 걷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평범한 월급만으로
서울의 신축 아파트를 마련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20∼30대에게 재개발은
또 하나의 가능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기대하는
새 아파트가 만들어지는 자리에는
이미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삶이 존재해왔다.

재개발이라는 한 단어 안에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사람과
새로운 주거 기회를 찾는 사람의
서로 다른 시간이 동시에 들어 있는 셈이다.

‘한남 아파트 탄생기’는
그 가운데 어느 한쪽만을
화려하게 보여주기보다
한 동네를 둘러싼 서로 다른 시선을 따라간다.

도시의 틈새를 찾아 모여든 사람들

도시의 틈새를 찾아 모여든 사람들
도시의 틈새를 찾아 모여든 사람들

“서울권에서 일을 하면서
저렴한 곳을 찾다 보니,
보통 재개발 구역에 살다가 계속 이사를 가는 거죠
그러니 소속감이나 정을 느낀 적이 없는데
여기는 없어지면 좀 아쉬울 것 같아요.”

보광동은 개발을 기다리는
부동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동네다.

오랜 시간 서울에서
비교적 저렴한 집을 구해야 했던 사람들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산업화 이후 서울로 올라온 이주민부터
외국인과 성소수자,
도심에서 일하지만 비싼 주거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청년까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보광동에 들어왔다.

새 아파트가 아닌
오래된 집과 좁은 골목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낮은 주거비로
서울 안에 머무를 수 있는 틈이 생겼다.

실제로 보광동의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절반을 넘는다.

직장인 한지슬 씨도
그 틈을 찾아 들어온 청년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5년 전
강남으로 출퇴근하기 편하면서도
주거비 부담이 크지 않은 곳을 찾다가
보광동에 자리 잡았다.

보증금은 300만 원,
월세는 35만 원이다.

서울 도심에서는 찾기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방의 크기는 5평 남짓하다.

생활하다 보면
불편한 부분도 적지 않지만
한지슬 씨는 그 작은 방 안에서
자신만의 일상을 만들어왔다.

처음 보광동에 들어올 때만 해도
이곳을 오래 머물 고향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서울에서 일을 하며
저렴한 곳을 찾아다니다 보면
재개발을 앞둔 동네로 들어갔다가
사업이 시작되면 다시 옮겨가는 생활이 반복됐다.

그 과정에서 특정 동네에
깊은 애정을 갖거나
이웃과 오랜 관계를 맺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보광동에서
5년을 보내고 나니 마음이 달라졌다.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고 시작한 생활이었는데도
정작 동네가 없어질 시간이 가까워지자
아쉬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청년과 미래를 위한
새로운 주거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
재개발의 중요한 명분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저렴한 오래된 집에서 살던 청년들은
새로운 아파트가 완성된 뒤에도
같은 동네에서 계속 살 수 있을까.

새 도시가 청년에게
어떤 미래를 제공하는지 묻기 전에,
기존 도시의 틈이 청년에게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도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다.

5평의 작은 방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서울 생활을 가능하게 한
첫 번째 집이었다.

보광동이 사라질 때
없어지는 것은 낡은 건물만이 아니라
그런 작은 시작의 공간일 수도 있다.

사라지는 보광동에서 도시의 미래를 묻다

사라지는 보광동에서 도시의 미래를 묻다
사라지는 보광동에서 도시의 미래를 묻다

“공간이나 동네라고 하는 건,
우리의 삶과 오래된 시간을 담아내는
‘거대한 그릇’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동네를 바탕으로, 우리의 미래를 점진적으로 만들어가는 게
훨씬 더 유리하고 건강한 방향이라 생각합니다.”

건축가 조정구는
보광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새로운 건물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뒤에도
그는 오래된 동네와 집을
계속해서 기록해왔다.

보광동 역시
그에게 단순한 건축 현장이 아니다.

어린 시절 자신이 걷던 언덕과
사람들이 살아온 집,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해온
골목이 겹쳐 있는 장소다.

보광동의 집들은
처음부터 완벽한 계획 아래
같은 모양으로 세워진 건물이 아니었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집이 이어졌고,
가족이 늘어나거나 생활 방식이 달라지면
필요한 공간을 덧붙였다.

작은 방이 생기고,
계단이 연결되고,
벽 하나가 더 붙으면서
집의 모습도 사람의 삶과 함께 바뀌었다.

밖에서 보면 불규칙하고
들쑥날쑥한 오래된 주택이지만,
조정구 건축가에게 그 형태는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필요와 시간이 쌓인 결과다.

한남3구역 철거를 앞두고
그는 사라질 집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무려 1,500채에 이르는 집을
모형으로 다시 만들어
철거 전 동네의 모습을 남겼다.

지금은 실제 건물이 사라졌더라도
그 모형 안에서는
보광동 골목과 주택의 형태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작업은 단순히
옛날 동네가 아름다웠다는
향수를 남기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조금씩 공간을 바꾸고
서로 다른 삶의 형태를 받아들였던
기존 도시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묻는다.

새 아파트는 더 안전하고
편리한 생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반면 대규모 단지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관계와
다양한 생활 형태가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한남 아파트 탄생기’는
보광동의 재개발을
낡은 동네가 새 아파트로
바뀌는 단순한 성공담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52년 된 쌀집을 지키는 사람,
아파트를 꿈꾸며 골목을 걷는 사람,
월세 35만 원의 작은 방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한 청년,
1,500채의 사라진 집을
모형으로 남긴 건축가가
같은 변화 안에 존재한다.

사라지는 보광동에서 도시의 미래를 묻다
사라지는 보광동에서 도시의 미래를 묻다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며
빠르게 팽창해온 서울에서
보광동은 다시 한 번
거대한 변화를 앞두고 있다.

몇 년 뒤 이 언덕에서는
지금과 전혀 다른
아파트 단지의 풍경을 보게 될 수 있다.

그때 새로운 집을 얻는 것과 함께
도시가 기억해야 할 오래된 삶은 무엇이며,
사라지는 골목에서 미래의 도시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

사진 : KBS 1TV ‘다큐 인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