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24일 방송된 JTBC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12회에서는 각자의 방식으로 무가치함과 싸워온 인물들이 저마다의 안온함에 닿는 결말이 그려졌다. 닐슨코리아 유료가구 기준 시청률은 전국 5.3%, 수도권 6%를 기록하며 자체 최고치를 경신했고, 작품은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거뒀다.
황동만과 박경세, 감정워치가 드러낸 후회
황동만은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다. 노강식의 스케줄 이슈로 촬영이 연기될 위기에 놓이자 그는 다시 조급해졌고, 어렵게 잡은 기회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에 흔들렸다. 제 손으로 무언가를 끝까지 이뤄내는 힘을 확인해야만 과거의 상처와 형 황진만에 대한 걱정까지 털어낼 수 있다는 절박함도 컸다.
불안은 박경세와의 갈등으로 터져 나왔다. 황동만은 자신을 향한 박경세의 뒷담화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았고, “제발 끝내자”고 절규하는 박경세를 보며 처음에는 통쾌함을 느꼈다. 그런데 감정워치에 떠오른 단어는 통쾌함이 아니라 ‘후회’였다.
그 순간 황동만은 바닥에 주저앉은 박경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 순수하게 영화만 사랑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감정의 방향을 바꿨다. 황동만은 “내가 데뷔해서 레벨 맞춰 올 테니 다시 같아지자”라고 눈물로 사과했고, 오랜 질투와 미움 끝에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황동만, 웃기게 살겠다는 답으로 영화를 완주하다
황동만에게도 기적 같은 전환점이 찾아왔다. 노강식이 스케줄을 조정해 조기 크랭크인을 제안하면서 멈출 뻔했던 영화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동만은 인생의 목적을 묻는 형 황진만에게 “난 그냥 웃기게 살 것”이라고 답했고, 처음으로 형에게 합격점을 받을 수 있는 말을 내놓았다.
이 답은 첫 고사 현장의 벅찬 선언으로 이어졌다. 황동만은 숱한 장애물 앞에서도 미친놈처럼 웃기게 가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촬영에 들어간 뒤에는 뜻대로 찍히는 신 하나 없었고, 스태프들의 신뢰마저 잃는 혹독한 현실과 맞닥뜨렸다.
그럼에도 황동만은 코미디를 놓지 않았다. 무너지고 흔들리는 순간마다 자신이 붙잡아야 할 장르를 다시 떠올렸고, 끝내 자신만의 빛나는 스토리를 완성해 나갔다. 영화 완주는 박경세에게 했던 “데뷔해서 레벨 맞춰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황동만은 다시 동등한 감독의 위치에서 박경세와 마주했다. 두 절친은 격 없이 웃고 장난을 치며 잃어버렸던 관계의 온도를 되찾았다. 황동만의 간절하고 치열했던 여정은 한국영화상 신인감독상 수상이라는 엔딩으로 이어졌다.
수없이 상상했던 장황한 수상 소감은 실제 무대에서 내려놓았다. 황동만은 “영실아, 삼촌 검색된다”, “은아씨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로 감격을 전했다. 인정받고 싶어 미워하고 떠들던 인물은 끝내 자신의 이름으로 검색될 수 있는 감독이 됐다.
변은아, 오정희의 말 앞에서 코피를 멈추다
변은아는 오래도록 트라우마 안에 갇혀 있었다. 안 풀리는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과거를 자꾸 끄집어냈고, 그 과거는 변명처럼 자신을 검열하는 알리바이가 됐다. 변은아는 자신이 상처를 피하는 방식으로 또 다른 상처를 반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그는 과거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았다. 대신 부정적 감정은 정확히 읽히는 순간 제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을 밀어내는 대신 그 뿌리를 바라보는 일이 변은아에게는 새로운 출발점이 됐다.
‘낙낙낙’ 수정 회의에서 오정희가 시나리오의 빈틈들을 지적하자 변은아에게는 공격받았다는 느낌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예전 같으면 무너졌을 순간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감정의 뿌리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나는 당신의 말로 죽을 수 없는 존재”라고 처음으로 각성한 순간, 거짓말처럼 코피가 멈췄다.
고혜진과 박경세, 비극을 지나 더 단단해진 부부
고혜진은 자신이 박경세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박경세가 도덕적인 남편이라는 틀에 묶여 용맹하게 창작자로 치고 나가지 못한다고 느꼈고, 그 틀을 풀어주기 위해 이혼을 제안했다. 그 말은 관계를 버리겠다는 선언이라기보다 박경세가 자기 이름으로 서기를 바라는 고통스러운 선택이었다.
박경세도 결국 홀로서기를 택했다. 그는 모든 영광과 욕을 혼자 감당하겠다며 공동작가 박정민을 해고했고, 더는 누군가 뒤에 숨지 않겠다는 결심을 드러냈다. 혜진에게는 “잘못했다. 1등은 못해도 3등은 하겠다”며 뒤늦은 사과를 건넸다.
고혜진은 박경세의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그의 말 앞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인생의 비극을 함께 지나온 부부는 화려한 회복 대신 더 애틋하고 단단해진 연결로 서로를 붙잡았다.
황진만, 잃어버린 딸 소식에 다시 봄을 쓰다
황진만은 시보다 용접이 더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용접을 하는 순간만큼은 잡념이 올라오지 않았고, 시를 쓰지 않아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술 이외에 답이 없었고, 그의 안에는 여전히 막힌 숨이 남아 있었다.
그 숨이 처음으로 터진 순간은 장미란의 SNS 글에서 찾아왔다. 장미란이 올린 글을 통해 핀란드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15세의 잃어버린 딸 황영실 사진이 날아들었다. 황진만은 그 얼굴 앞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계절을 다시 마주했다.
황진만은 절필 이후 처음으로 다른 계절을 기다리는 봄에 대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에는 기적처럼 흐드러지는 날씨가 펼쳐졌다. 삶이 완전히 회복됐다는 선언은 아니었지만, 다시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는 변화만으로도 충분한 봄이었다.
장미란과 변은아, 잃어버린 자매처럼 서로를 안다
장미란에게도 진짜 관계가 생겼다. 오정희가 “CCTV 원본을 통으로 까자”는 강수로 한승아의 협박을 물리치는 모습을 본 장미란은 깊이 감동했다. 그 순간 그는 친아빠는 건사하지 않더라도 새엄마는 끝까지 지키겠다고 마음먹었다.
장미란은 자신에게 엄마를 빼앗기고 버려진 오정희의 근사한 친딸 변은아도 눈물로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상처를 지나왔지만, 같은 결핍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 잃어버렸던 자매가 만난 듯 서로의 품에 꼭 안긴 모습은 상처 입은 영혼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장면이 됐다.
오정희 역시 변은아를 “잘 컸다”고 인정했다. 그 말은 뒤늦게 도착한 위로이자, 오랜 시간 자기 힘으로 버텨온 변은아를 향한 인정이었다. 관계를 잃고 살아온 이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서로를 새롭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얻었다.
이 결말의 힘은 상처를 완전히 지우는 데 있지 않고, 상처를 가진 채 자신을 덜 미워하게 되는 순간에 있다. 무가치함을 통과한 인물들의 안온함이 시청자에게 어떤 여운으로 남을지 주목된다.
불안함 속에서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던 이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구원에 닿았다. 누군가는 감독이 됐고, 누군가는 말 앞에서 죽지 않는 존재가 됐으며, 누군가는 다시 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출처 : JTBC